발달장애

조선시대에는 자폐인과 장애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

느린걸음큰발 2023. 12. 17.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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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인중 지능이 높은 자폐인 같은 경우는 학습능력은 문제가 없는데 규칙에 집착하는 고지식한 성격으로 인해 주변인들과 마찰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이 과거에는 법 없이도 잘 사는 사람으로 칭송받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특히 한번 본 책 또 보고 수십 수백번 봐서 아주 머리속에 달달달 외우는 암기천재 조선선비들중 고기능 자폐인이 있었다면 임금께 중용되어서 고위 벼슬에 임용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요즘사회는 융통성을 중요시하지만 과거에는 융통성보다는 고지식한 선비가 사회적 대우를 많이 받았죠
 
영조실록에 의하면 
'전국팔도에 모두 호환이 있었는데 영동지방이 가장 심하여 호랑이에게 물려서 죽은 자가 40여인에 이르렀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호환(호랑이의 습격)이 많은 조선시대에 주변환경에 민감하고 감각이 예민한 (특히 자폐인은 청각이 매우 우수합니다.) 자폐인같은 경우는 미리 호환을 피할수 있는 능력도 있지 않았을까 추론합니다.
필자는 이런 상상을 통해서 검색하던중 대한민국 문화재청의 훌륭한 기고문을 찾았습니다.  
(다음글은 대한민국 문화재청의 기고문을 인용했습니다.)
조선시대 장애인, 그들에게 사회적 장애는 없었다

선진적인 장애인 복지정책
조선시대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복지정책은 오늘날에 비해서도 상당히 선진적이었다. 우선 그들은 장애인에게도 직업을 갖고 자립생활을 하도록 권하였다. 예컨대 조선후기의 실학자 최한기는『인정人政』에서 어떤 장애인이라도 배우고 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학파의 선구자 홍대용도『담헌서』에서‘소경은 점치는 데로, 궁형 당한 자는 문지키는 데로 돌리며, 심지어 벙어리와 귀머거리, 앉은뱅이까지 모두 일자리를 갖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애인을 무조건 사회적 약자로 여기면서 집안이나 복지시설에 유폐시킨 채 장애 수당만 지급하면 끝이라는 오늘날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정부는 장애인을 위한 다양한 지원정책을 펼쳤다. 장애인에겐 조세와 부역 및 잡역을 면제하고, 죄를 범하면 형벌을 가하지 않고 면포로 대신 받았으며, 연좌제에도 적용하지 않았다. 또한 시정侍丁, 즉 부양자(활동보조인)를 제공하고, 때때로 노인과 함께 잔치를 베풀어주며 쌀과 고기 같은 생필품을 하사했다. 기타 동서활인원이나 제생원 같은 구휼기관을 설치하여 위기에 처한 장애인을 구제하였다.

장애를 갖고 있었던 왕족
이처럼 선진적인 장애인식과 복지정책을 갖고 있었던 탓인지, 조선시대에는 장애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뛰어난 공적을 이룬 역사적 인물들이 대단히 많았다.
먼저 조선시대엔 왕실이나 종친 등 왕족 중에서도 상당수의 장애인이 존재했다. 조선의 제4대 왕인 세종은 평생 동안 소갈증과 풍습병 등 많은 질병에 시달렸는데, 특히 안질眼疾곧 시각장애로 많은 고생을 했다. 참고로 조선시대 사람들은 시각장애를 안질, 즉 눈에 병이 있어서 그러한 것으로 생각했다. 세종이 본격적으로 시각장애를 입게 된 것은 35세 무렵부터인데, 45세부터는 더욱 심해져서 자주 온천에 가서 치료하기도 했다. 심지어 세종은 음침하고 어두운 곳은 지팡이가 없으면 걷기가 어려울 정도라고 말하였다.
제14대 왕인 선조는 계속 심질 혹은 광질, 다시 말해 정신장애 중 정신분열증에 시달렸다. 선조의 심질은 37세인 1588년부터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하는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의 심질은 더욱 악화된다. 급기야 전광증 곧 광인이 되어 가는데, 그래서 계속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호소하였다.
제19대 왕인 숙종도 56세부터 시각장애를 입게 되었다. 왼쪽 눈은 거의 실명에 가까웠고, 오른쪽 눈은 보이기는 하나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이후 숙종의 시각장애는 더욱 심해져서 왼쪽뿐만 아니라 오른쪽 눈마저도 전혀 물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숙종 44년(1718) 세종 때의 전례에 따라 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 하게하였다.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은 자폐증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얼굴에 표정이라곤 거의 없었고 주변의 일에도 관심이 없었는데, 사물의 형태나 이름에 대해선 놀라운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장애인에게도 열려있었던 벼슬길
조선시대엔 장애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능력만 있다면 오늘날의 장관이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벼슬까지 오를 수 있었다. 세종대의 정치사에서 황희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조선 건국 후 예악을 정비하고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공을 세운 허조(許稠, 1369~1439)였다. 이후 허조는 좌의정에 오를 만큼 세종의 큰 신임을 받았는데, 그는 원래 어려서부터 체격이 왜소하고 어깨와 등이 구부러진 곱추, 즉 척추장애인이었다.
권균(權鈞, 1464~1526)은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4등에 녹공되고 영창군에 봉해진 인물이다. 이후에도 그는 좌찬성, 이조판서, 우의정에 임명되고 영창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러한 권균에게도 한가지 고질병이 있었으니 바로 간질 장애인이었던 것이다.
윤지완(尹趾完, 1635~1718)은 숙종대의 문신으로, 기개와 도량이 뛰어나고 청렴 검소하여 많은 사람들의 신망을 받았다. 1682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는데, 이후 풍증으로 한쪽 다리를 잃고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하지만 벼슬은 더욱 현달하여 우의정이 되고 청백리에 뽑혔다. 그래서 사람들이‘일각정승(한쪽 다리의 정승)’이라 불렀다.
이외에도 영, 정조 때의 명재상이었던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한쪽 눈이 사시이자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이었다. 또한 이덕수(李德洙, 1577~1645)는 영조 때의 문신으로, 내직으로는 대사성과 대제학, 대사헌, 이조판서, 공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지냈고, 외직으로는 개성유수를 지냈다. 심지어 그는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귀가 어두워 소리를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 이었다.
 
장애를 딛고 예술혼을 불태웠던 장애인
사람들은 장애인 예술가라 하면 대개 호메로스나 이솝, 손자, 세르반테스, 베토벤 등 동서양의 유명한 예술가들만 떠올리지만, 조선시대에도 문인이나 서화가, 음악가 등 장애인 예술가가 대단히 많았다. 장애인 문인으로는 조선후기 시각장애인 시인 유운태(劉雲台, ?~?)와강이천(姜彛天, 1768~1801), 척추장애인 시인이자 소설가 및 학자였던 조성기, 시각장애인 시인 부부였던 김성침과 홍씨, 지체장애인 시인 강취주, 중복장애인 지여교, 지체장애인 시인이자 출판인, 아동교육자였던 장혼 등을 들 수 있다.
장애인 서화가로는 묵죽화가 이정(李霆, 1554~1626)과 최북(崔北, 1720~?), 조광진(曺匡振, 1772∼1840) 등이 있었다. 이정은 조선중기 왕실의 종친이자 서화가로, 임진왜란 때 오른팔에 부상을 입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대나무 그림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묵죽화의 대가였다.
최북은 영조 때 한쪽 눈의 시각장애인 화가였는데, 중인의 자식으로 태어나 전문적으로 그림을 그려 팔아서 먹고 산 직업화가였다. 그는 술을 좋아하고 성격이 자유분방하여 여기저기에 많은 일화를 남겼다.
조광진(曺匡振, 1772~1840)은 정조와 순조, 헌종 때의 유명한 언어장애인 서화가였는데, 당대 최고의 명필이자 비평가였던 추사 김정희에게 까지 찬사를 받을 정도로 명필이었다.
조선시대엔 별도로‘관현맹인’제도를 두어 시각장애인의 자립을 지원하였다. 그래서 시각장애인 음악가가 대단히 많았을 뿐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 유명한 사람들도 상당수 출현하였다. 대표적으로 조선전기엔 이반과 정범, 김복산, 이마지 등이 있었고, 기타 민간에서는 백옥과 김운란이 자못 유명하였다. 조선후기에도 관현맹인 출신의 시각장애인 음악가가 계속 출현했는데, 숙종대의 하효달과 홍석해, 김석명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조선후기에는 이들보다 거리를 떠돌아다니며 음악을 들려주고 먹고 사는 시각장애인 음악가가 많았는데, 백성휘와 윤동형, 손봉사 등이 대표적인 인물 이었다.
이처럼 조선시대만 해도 장애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오늘날에 비해 훨씬 덜하였다. 그래서 장애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뛰어난 공적을 이룬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다. 다시 말해 조선시대 장애인에겐 오늘날과 달리 사회적 장애는 별로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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